2024.01.18.
줄요
(c) sunce




백발의 노인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코트 자락이 비에 젖은 요한은 불평을 쏟아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었다. 포터가 다가와서 우리의 몇 안 되는 짐을 카트에 담았다. 나는 그에게 팁을 주었고 요한은 곧장 데스크로 가서 방을 예약했다. 신문을 읽던 노인이 커피를 마셨다. 조금 떨어진 그 옆으로 남자 둘이 자리에 앉아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지만 조용했다. 바로 옆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포터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이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그런 호텔에서, 딱딱하고 어울리지 않는 강세로 말하는 요한의 이태리어가 거슬렸다. 직원의 목소리가 길어질수록 요한은 점점 이상하게 혀를 굴리면서 말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건 요한의 심술이었다. 직원이 하는 말이 요한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노인은 커피잔을 기울여서 남아 있는 커피까지 모두 마시고 신문을 접어서 커피잔 옆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지긋하게 읽던 신문을 순식간에 넘기고 마지막 페이지는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는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남자 둘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깍지 껴서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 내 팔을 건드렸다. 요한이었다. 요한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큰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요한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면 바로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사 층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요한이 말했다. 어깨가 젖었잖아. 아름답지만 시건방진 목소리였다. 나는 가슴의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낼 생각이었다. 손수건이 없었다. 자켓과 바지 주머니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식당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잃어버린 거야? 요한이 엘리베이터 구석에 삐뚜름하게 기대어 서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아, 잊고 있었어. 그깟 손수건 한두 개……. 캐시미어든지, 실크든지, 누구에게 받은 건지도 네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 요한은 연극적인 몸짓으로 이마를 짚었다. 코트와 바지 밑단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엘리베이터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얕은 웅덩이가 생겼다. 발을 떼기 위해서는 평소의 걸음보다도 힘을 주어 바닥을 밀어야 했다. 고작 어깨가 젖었다고. 나는 요한에게 다가가서 두껍고 부드러운 원단으로 만든 코트에 얹힌 물방울을 털어냈다. 몇 방울 묻어 있지 않아서 닦아낸 손등이 여전히 깨끗했다. 축축해지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서 발바닥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용하게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달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어두운 곳이었다. 요한이 말했다. 네 어깨 말이야. 요한이 손을 들어 내 어깨를 털었다. 아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요한의 눈이 내 어깨를 보고 있었다. 속눈썹이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 서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요한이 말했다. 아까 와인을 주문했어. 방에 들어가면 금방 직원이 가져올 거야. 오랜만에 마시는 미아니거든, 기대하고 있어.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요한의 앞에 커다란 발자국이 남았다. 엘리베이터는 사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고 복도가 길었다.
요한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허물을 벗듯이 옷을 바닥에 하나씩 떨어뜨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금방 포터가 짐과 함께 와인을 가져왔다. 98년 미아니 메를로였다. 나는 요한이 흘린 옷들을 집어 내 비에 젖은 자켓과 함께 세탁을 맡겼다. 포터가 가져온 서류 가방 몇 개가 전부인 짐은 빈 옷장 안에 나란히 세워놓고 요한을 기다리며 천이 부드러운 의자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던 노인처럼 손을 깍지 끼워서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고개가 의자의 등받이 뒤로 넘어갔다. 비가 계속 내렸다. 천둥이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가 계속 내렸다. 와이퍼로 밀어내던 물덩이와 턱을 괴고 물줄기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는 거리를 바라보던 요한이 조수석에 있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그러고 보니 요한은 이미 식사 자리에서 와인을 두 잔 마셨다. 요한이 입술을 닦기 위해 내 손수건을 가져갔었다. 손수건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오른쪽 눈에 끼워둔 의안이 뻑뻑했다. 어느새 샤워를 끝내고 나온 요한이 가운만 걸치고 침대에 게으르게 누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잤어? 그가 물었다. 와인은 반이 비어 있었다. 나는 누워 있는 요한에게 다가갔다. 그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부드럽게 쥐었다. 오늘 많이 마셨어. 목소리가 잠겨서 말하는 중간에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요한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탁자에 와인잔을 두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척 천천히 말했다. 일부러 고른 방은 아니야. 이 방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어.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요한은 하나뿐인 침대의 가운데에 누워 일어나지 않을 마음을 먹은 듯했다. 손수건을 잃어버린 게 아직까지 괘씸했던 모양이었다.
아침에 다녀올게. 나는 그렇게 말을 했다. 요한은 나의 말이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이 나를 향해 눈썹을 기울였다. 나는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행동이 미숙했다. 스스로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요한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디를? 뒤에서 요한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리고 천둥이 쳤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그 발음을 잊고 말았다.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공기를 빼는 순서를 잊었다. 읊조리던 단어는 이어지지 않고 죽어버렸다. 천둥 다음에 번개가 쳤다. 아주 먼 곳의 피뢰침을 찾아간 듯했다. 번쩍이는 그림자는 눈에 들어왔지만 그 작은 번개가 어디로 꽂힌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은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하고 있었지, 무슨 단어를 말하려고 했지. 그런 것들을 더듬었다. 나는 왜 고개를 숙이고 있지. 그런 것들을.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이 뻗쳐왔다. 차가웠고 고집스러웠다. 요한은 취해 있었다.
나는 요한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떨어진 다음의 빗소리는 전보다 더 둔탁했다. 창문을 깨어버릴 듯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창문이 깨져서 방안으로 비바람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비바람이 방안을 휩쓸면 젖은 침대와 젖은 의자를 피해 로비에 내려가 잠을 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커피를 마시던 노인의 옆자리에서 불편하게 몸을 웅크려 자는 요한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두 명의 남자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가까이 있다면 소리를 삼키던 카펫도 소용없다. 포터는 바닥의 대리석을 깨뜨릴 것처럼 걸어 다닐 것이고 요한을 응대했던 직원의 말은 끊기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낡은 도르래가 돌아가며 나는 쇳소리가 로비를 채울 것이다.
창문에서 쩌저적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요한의 손을 떼어내고 블라인드를 내리려 했다. 요한이 말했다. 나는 와인 몇 잔 마신다고 취하지 않아.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요한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포터가 짐과 와인을 가져오고 나는 그에게 세탁물을 맡겼다. 포터가 나가고 나는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감았다. 요한이 침대에 누워 포터가 가져온 와인을 마셨다. 요한이 몇 마디, 내가 몇 마디를 말했고 천둥이 쳤다. 나는 방에 들어오고서 전등을 조작하지 않았다. 요한이 만진 모양이었다. 방이 깜깜했다. 나는 요한의 얼굴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요한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술에 취해 붉어진 볼도 보이지 않았다. 요한이 와인을 마시기 위해 켜 놓은 듯한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작은 등 하나. 이 넓은 방에 켜진 불은 그게 전부였다. 오로지 내 손을 움켜쥔 하얀 손만 비추는 불. 아주 창백하고…… 식당에 두고 나온 손수건처럼 부드러운 손이 하나뿐인 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손은 아주 컸다. 내 눈에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랬다. 손수건을 정말 식당에 두고 나왔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웅덩이에 쏟아지는 빗방울들, 파도처럼 쓸려내려가는 소리만 들리는 길거리에 떨어뜨린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식당을 찾아가도 손수건은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손을 움츠렸다. 허벅지 위에서 손이 두껍게 말려갔다. 요한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그는 내가 탁자에 둔 와인잔을 가져갔다. 그를 말리지 않았다. 요한은 술에 취해서 어렸을 때 배웠다는 이태리어 가곡 몇 곡을 부르고 잠들었다. 요한이 하는 이태리어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뿐이었다. 나는 의안을 꺼냈다. 뻑뻑해서 눈을 감기가 힘들었다. 닦아야 했는데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눈을 만지면 눈두덩이가 꺼진 모양이 느껴졌다. 비가 계속 내렸다.
창문 어느 곳에도 금이 가 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블라인드를 내렸다. 거리는 물줄기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는 물방울 모양대로 휘어져 있었고 아직 켜져 있을 가로등도 꺼져 있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조수석에 앉았던 요한은 어떤 거리를 보았던 건지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빗속을 운전하던 일처럼 블라인드를 내렸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손등에 비 그림자가 그려졌다. 요한이 마시던 와인잔을 치우고 요한이 뒤척이는 대로 주름이 잡힌 이불을 바로 폈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서 의자에 앉아 조금 남아 있는 와인을 마셨다. 붉은 와인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얼음을 넣어 마시고 싶었다. 요한이 알면 질색할 일이었다. 로비의 소파에 앉아 있던 노인을 생각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던 노인을. 이미 일어났던 일만을 적어둬서 이제는 다시 읽을 필요도 없어 바람에 날리듯 넘어가는 신문과 빈 커피잔을 테이블에 늘어놓으면서 눈을 감아도 깨어 있는 그 마음을 생각했다. 요한은 잠들었다. 비바람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창문을 세게 두드렸다. 가끔 그 소리에 나는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창문과 방문은 서로 다른 방향에 있었는데도. 나는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 핑계를 댔다. 잠들어 있는 요한에게. 넓은 침대를 따라 흐트러진 그 긴 머리를 만졌다. 굵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비가 계속 내렸다. 또다시 천둥이 쳤다. 방이 울렸다. 나는 어깨를 웅크렸다. 혀끝에 와인 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요한의 입술에서 나는 향과 같았다. 시트에 와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내일 아침의 일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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